‘더 글로리’가 2주 연속 넷플릭스에서 세계 1위를 하며,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시즌2에서 가장 화제성이 높은 장면을 꼽으라면, 최고 빌런 ‘박연진’이 교도소에서 날씨예보를 하는 신 일 것이다.
학교 폭력에 시달린 주인공 문동은이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라는 명대사를 읊게 만들며, 남다른 꿈을 심어준 복수 상대가 바로 ‘박연진’이었기 때문. 장장 16회를 이끌게 만든 장본인이자 가해자인 박연진의 최후 결말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이미 대략적인 해석이 존재하지만, 대다수가 놓쳤던 치밀한 복수장치까지 전직 기상캐스터였던 필자의 시선으로 정밀하게 분석해보았다.
1. 연진아, 이젠 너 차례야.
1화에서 어린 시절 문동은의 방을 기억하는가? 동은의 방으로 향하는 어두컴컴한 복도 양쪽에는 마치 감옥처럼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리고 도착한 동은의 방에는 박연진 무리가 무단침입해 술판을 벌이고 있다.
이때, 피해자 ‘동은의 방’과 가해자 ‘연진의 감방’은 너무나 닮았다.
4평도 안 돼 보이는 공간, 어둠이 드리운 창문, 방범 창살. 카메라의 구도까지 흡사하다.
이어 괴롭힘이 클라이맥스에 달하는 장면이다. 웃고 있는 가해자들 속에, 유일하게 창살을 등지고 서 있는 이 두 사람.
(첫 회) 피해자 문동은의 위치에, (최종회) 가해자였던 박연진이 서 있다. 철저한 인과응보다. 가해자가 나중에는 입장이 바뀌어 똑같은 집단 폭력의 피해자가 된 결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 연진이의 “1분, 내 인내심.”
박연진은 10화에서 손명오에게 “1분, 내 인내심.”이라며 말할 시간을 제한한다. 평소 은근히 손명오를 낮잡아 봤기에 권위 의식에서 비롯된 말이었을 터. 그런데 본인이 명령한 그 ‘1분’을 기가 막히게 잘 맞춘 사람은, 바로 박연진 자신이다.
교도소에 수감된 후, 넋을 놓고 폐인처럼 앉아 있는 연진에게 한 재소자가 말을 건넨다. “야 이쁜아, 내일 날씨 뭐야? 엉?” 그러자 연진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동반사적으로 일어난다. 옷매무새까지 예쁘게 다듬고 준비하는데 걸린 시간 13초. 이어 14초부터 날씨예보 멘트를 시작하여 끝내기까지 51초 컷. 이 정도면 우두머리 재소자의 인내심도 넉넉히 충족시켜 준 연진이다.
입소 전 박연진은 ”내가 (대본을) 쓰면 거지같이 나오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날씨 원고를 쓸 능력이 안 돼서,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맡겼다. 그러나 교도소에서는 단 13초 만에 스스로 날씨 대본을 머릿속으로 작성할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것도 감옥에서 날씨를 알 수 있는 것은 창문이나 끽해야 야외 활동 잠깐뿐일 텐데, 하늘을 보고 알아맞혀 버린다? 그 어려운 걸 연진이가 해낸다. 원고의 수준은 둘째 치더라도, 브라보! 멋지다 연진아!
실제 기상캐스터는 ‘방재기상정보 시스템’이란 기상청의 전문적인 사이트를 통해 기후 관측 자료를 분석하며 원고를 작성한다.
이렇게 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6개월. 겨울날 문동은이 면회를 온 이후, 반팔 죄수복을 입고 있는 2023년 여름 시점이다. 결론인즉, ‘우리 연진이가 달라졌어요’가 된 이유는, 천하의 빌런 박연진도 복종해 날씨예보를 할 만큼 재소자들이 그동안 괴롭혔다는 뜻이다.
3. 연진아 마지막 기상캐스터 신은 NG야, 망했어!
감방에서 날씨를 전하는 도중 연진은 재소자들의 반응을 한번 살핀다. 왕(王)언니로 보이는 재소자 외에 나머지 재소자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늘 상 있는 일이라 흥미롭지 않아서인지 무반응이다. 온갖 관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살아왔을 연진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굴욕적일 것이다. 비참함에 눈물이 저절로 흐르지만, 반듯한 치열이 다 드러나도록 웃으며 표정 관리를 한다. 프로다. 그러나 아쉽게도 감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연진이 기상예보를 마치자, 재소자들은 “왜 날씨가 슬퍼?”라고 깔깔대며 조롱한다.
사실 잘했어도 이 날씨예보는 NG다. 기상캐스터가 방송할 때 뒤에 날씨 CG가 나오지 않는가. 그때 ‘크로마키’라는 화면 합성 기술을 사용하는데, 보통 블루 스크린을 배경으로 촬영한 뒤 배경색 부분을 제거한다. 이때 같은 계열의 푸른색 옷을 입으면, 옷까지 없어지기 때문에 입으면 안 된다.
연진이 입은 죄수복의 색상은? 그렇다, 푸른색이다. 입고 기상캐스터를 하면 방송사고로 망한 거다. 마치 망한 박연진의 인생처럼 말이다. 이걸로 연진이 망했다고 해석하기엔 다소 억지스럽다 생각된다면, 또 하나를 제시한다.
연진의 죄수 번호 ‘3886’
‘스트롱 코드’라는 게 있다. 성경 단어들에 번호를 붙여놓은 것으로, 이를 활용하면 번호에 해당하는 단어와 뜻을 알 수 있다. 스트롱 코드는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도 주단태를 비롯한 악역들의 죄수 번호에도 쓰여 복선을 제공하기도 했다.
여하튼 연진의 죄수 번호 3886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는 παραλύω로, ‘망하게 하다, 약하게 하다, 불구자로 만들다’라는 의미다. 이러나저러나 망했다는 이야기다. 모든 순간에 기뻐하던 연진의 영혼이 탈탈 털리는 결말,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다.
4. 연진아, 성대가 타고났구나? 넝~담!
연진의 직업은 기상캐스터다. 알다시피 기상캐스터는 말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목소리 관리를 잘해야 한다. 그런데 연진은 성대에 최악인 것들을 일삼는다. ‘흡연, 소리 지르기.’
과거 고등학생 박연진은 14화에서 윤소희에게 보풀을 정리해 준다면서 불을 지피는데, 이때 라이터를 꺼낸다. 이를 미루어봤을 때 직접적인 흡연 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청소년기부터 이미 흡연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골초를 방불케 하는 흡연 신이 수시로 나오며, 전재준과 함께 ‘보헴 시가 No.6’를 피운다. 보헴 시가 No.6은 타르 6.0mg, 니코틴 0.5mg으로 국내 일반 담배 타르 함유량 0.1~8.0mg, 니코틴 함유량 0.01~0.7mg에 비추어보았을 때 독한 편에 속한다. 고함량의 유해물질이 포함된 담배는 성대와 후두 점막을 손상시키는 주범으로, 쉰 목소리를 만들고 발성에 최악이다.
그런데 연신 큰 소리를 질러대는 연진의 목소리는 내내 낭랑하다! 게다가 술 마시는 장면은 있어도 물 마시는 장면은 못 본 거 같다. 이쯤 되면 같은 목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기상캐스터 박연진 캐릭터의 튼튼한 성대가 부럽기까지 하다.
물론 드라마 속 가상 인물이니까 건강한 거지, 박연진을 연기한 임지연 배우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이 같은 말을 남겼다. “워낙 소리를 많이 지르다 보니깐 목이 하루종일 촬영하고 나면 남아나지를 않았고, 한 공간 안에서 담배를 계속 피우다 보니깐 목소리가 잘 안 나오더라.”
갑자기 전재준의 대사가 떠오른다. “야, 멘솔 펴 멘솔. 거, 목이 뻥 뚫린다.”
물론 넝~담!
심아름(아나운서/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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